TL;DR

  • 나는 일을 시작하는 데 오래 걸리는 타입이다. 블럭마다 뭘 할지 정해져 있지 않으면 시작이 매우 늦어진다.
  • 그래서 2026년 10월, 일정을 구글 캘린더로 일원화하고 블럭마다 할 일 목록(Todoist)을 붙였다.
  • 한 달 해 보니 처음 세운 가정 중 세 가지가 틀렸다. AI로 일하면 모든 일이 딥워크가 되고, 코드 읽기 블럭은 필요 없어지고, 전날 정한 할 일은 다음 날 와닿지 않는다.
  • 지금은 "오전 메인 업무 하나 → 오후 가벼운 일 → 불편로그 해결 → 마감 로그" 구조로 정착했다. 그리고 이 구조에서 블로그 글이 멈췄다는 걸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상황: 블럭은 있는데 시작을 못 한다

일정을 자주 놓치는 편이라 10월부터 모든 일정을 구글 캘린더 하나로 모았다. 회사·가족·교회·사이드 프로젝트·루틴으로 캘린더를 나눴고, 평일 업무 시간에도 블럭을 그어 두었다.

문제는 블럭만으로는 부족했다는 점이다. "14:00~15:00 업무"라고 적혀 있어도 막상 그 시간이 되면 뭘 할지 고르는 데 한참이 걸렸다. 특히 오후 블럭이 자주 비었다. 빈 시간이 생기면 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편해지는 성향이라, 이게 꽤 스트레스였다.

1차 설계: 블럭마다 할 일 목록을 붙이자

캘린더 블럭만으로는 "그 시간에 뭘 할지"를 알 수 없으니, 블럭별로 Todoist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 딥워크
  • 코드 읽기
  • 오후 작은 일
  • 셀프파이어 (사이드 프로젝트)

블럭이 시작되면 해당 프로젝트를 열고 맨 위의 할 일을 집으면 된다. 고르는 비용을 없애는 게 목표였다.

버린 가정들

한 달 동안 이 구조를 돌리면서 세 가지 가정을 버렸다. 이 글에서 가장 남기고 싶은 부분이다.

1. "딥워크"와 "자잘한 일"은 나눌 수 있다 → (버림)

딥워크 블럭과 작은 일 블럭을 따로 둔 건 집중력이 필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따로 있다는 전제였다.

그런데 AI와 같이 일하다 보니 이 경계가 사라졌다. 작은 버그 하나를 고쳐도 AI에게 맥락을 설명하고, 결과를 검토하고, 근거를 확인하는 과정이 들어간다. 작은 일도 결국 판단의 연속이라 모든 일이 딥워크가 돼 버렸다. 블럭 이름이 실제 일과 맞지 않으니 어색함만 남았다.

2. 코드 읽기는 따로 시간을 내야 한다 → (버림)

매일 13:30에 코드 읽기 블럭을 뒀다. 남이 짠 코드를 꾸준히 읽어야 실력이 는다는, 오래된 조언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코드 대부분을 AI가 짜 준다. 따로 시간을 내서 읽을 필요를 못 느꼈다. 대신 AI가 만든 코드를 머지하기 전에 읽는 것으로 바꿨다. 읽기가 별도 활동이 아니라 머지의 완료 조건이 된 셈이다.

3. 전날 내일 할 일을 정해 두면 시작이 빨라진다 → (버림)

업무 마감 때 "내일 카드 1장"을 써 두는 방식도 해 봤다. 많은 생산성 조언이 권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막상 다음 날이 되면 전날 써 둔 카드가 와닿지 않았다. 하루 사이에 상황이 바뀌기도 하고, 전날의 나와 오늘의 나가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달랐다. 결론은 할 일은 그 순간에 정하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대신 블럭이 시작될 때마다 우선순위를 바로 정할 수 있게,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 9~10시를 일정 정리 시간으로 고정했다. 정리하다 보면 앞으로 뭘 할지 보여서 오히려 재미있다.

번외: 할 일 도구에 해결 근거까지 적기 → (버림)

Todoist 할 일을 체크만 하는 게 싫어서, 완료할 때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코멘트로 남겼다. 그런데 기록이 할 일 도구와 작업 로그로 나뉘면서 계속 꼬였다.

지금은 해결 기록(문제·물어본 것·해결·근거)은 구글 시트 작업 로그 한 곳에 모으고, Todoist는 완료 체크만 한다. 관리할 도구가 늘어나는 게 생각보다 큰 부담이었다.

지금 구조

버리고 남은 평일 업무 블럭은 이렇다.

시간 블럭 하는 일
09:00~10:00 일정 정리 오늘 블럭별 우선순위 정하기
오전 메인 업무 특정 메인 업무 하나만
12:30~13:30 점심 폰으로 되는 사이드 프로젝트 일
13:30~14:30 가벼운 업무 자잘한 요청·리뷰
14:30~16:30 불편로그 해결 겪은 불편을 하나씩 해결
16:45 업무 마감 작업 로그 한 줄씩 + 새 불편 추가

가장 잘 맞았던 건 불편로그다. 일하다 불편한 걸 바로 적어 두고, 오후 두 시간 동안 하나씩 해결한다. 뭘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고, 해결하면 일이 실제로 편해진다.

남은 문제: 블로그 글이 멈췄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블로그를 열어 보고 알았다. 마지막 글이 9월 29일이다. 정확히 블럭 일정을 짜기 시작한 시점에 멈췄다.

이유는 단순하다. 블럭 어디에도 글 쓸 자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블로그 쓰기" 블럭을 따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웃풋 전용 블럭은 1번에서 버린 "딥워크 블럭"처럼 실제 일과 따로 노는 칸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시도하는 방법은 글을 새 블럭이 아니라 기존 일의 완료 조건에 붙이는 것이다.

  1. 불편로그 블럭에서 하나를 해결한다.
  2. 업무 마감 때 작업 로그에 문제·해결·근거를 적고, 남에게도 쓸모 있겠다 싶은 줄에 표시만 한다.
  3. 표시한 줄은 AI가 블로그 초안으로 만들어 PR로 올려 둔다.
  4. 나는 점심시간에 폰으로 초안을 읽고, 고칠 것만 고쳐서 머지한다.

글을 "쓰는" 일이 "검토하는" 일로 바뀌면, 시작이 느린 성향에도 부담이 적을 거라고 기대한다. 이 글이 그 방식으로 만든 첫 글이다.

회고

  • 남들이 좋다는 방법(딥워크 구분, 코드 읽기, 내일 카드)도 내 일하는 방식이 바뀌면 유효기간이 끝난다. AI 도입은 꽤 큰 변화였다.
  • 버릴 때 "왜 안 맞았는지"를 적어 두니, 다음 구조를 짤 때 같은 실수를 덜 했다.
  • 다음에 비슷한 고민이 생기면 먼저 확인할 것: 이 블럭의 이름이 실제로 그 시간에 하는 일과 맞는가?